조선 초기朝鮮初期 회화, 계승과 변혁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약1392-약1550)는 왕조가 바뀌는 대변혁의 시기다. 고려 말에 등장한 신흥사대부가 주자학 수용의 기틀을 마련했고, 이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왕조를 건립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예술에서도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화는 새로운 변화의 시기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의 문화를 계승하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신사임당, <수박과 들쥐>,

종이에 채색, 34x28.3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초기는 혼란이 극복되면서 국가의 기반이 다져지고, 고유의 한글이 창제되어 반포되고 문물이 융성하는 등 문화적 성장과 업적이 쌓이게 되는 시기였다. 조선 초기에는 자연을 사랑하는 사대부士大夫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와 밀착되어 산수화山水畵가 한층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기 산수화는 고려시대로부터의 전통을 계승하고, 명明으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면서, 특유의 한국적 화풍을 발전시켰다(안휘준,『한국회화의 전통』, 문예출판사, 1992)

조선 초기에는 중국과의 사신 왕래를 통해 많은 문물이 공적, 사적으로 교류되었다. 서화의 교류도 고려 시대부터 축적되어 전해져온 것 외에, 사신들이나 화원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화가들의 산수화 작품들을 살펴보면 북송北宋의 이성과 곽희의 이곽파李郭派의 화풍과, 미불(米芾, 1051-1107)과 미우인(米友仁, 1086-1165) 부자의 미법산수米法山水 등 다양한 화풍이 동시에 나타났다. 또한 남송의 화원들이었던 마원(馬遠, 1160-1225)과 하규(夏珪, 1195-1224)가 형성한 마하파馬夏派 화풍, 명대의 절강성 화원화가 대진(戴震, 1388-1462)을 중심으로 한 절파浙派 화풍과 문인 중심의 심주沈周의 오파吳派 등이 조선 초기 화단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 초기의 회화는 왕실, 양반, 문인 등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취미 화가들과, 도화서圖畵署의 화원 출신으로 구성된 직업 화가들이 고려 시대이래 축적된 화풍과 송, 원대 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인 특색의 화풍을 보여준다.

초선 초기 대표적인 선비 화가로는 강희안, 강희맹, 양팽손(1488-1545), 대나무를 잘 그린 신잠(申潛, 1491-1554), 강아지를 잘 그린 이암(李巖, 1499-?), 일본 화단에 영향을 준 이수문(李秀文, 1403-?),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등이 있고, 화원 화가로는 안견(安堅, ?-?), 노비 출신으로 화원에 발탁된 이상좌(李上佐, ?-?) 등이 있다.

안견, 옛 그림에서 이치를 깨닫다

안견은 조선 초기 화원 화가다. 그는 1400년경 전후로 태어나 세종 때부터 세조 시기까지 활동했다. 안견은 1464년(세조10) 김시에게 대나무 그림을 그려 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까지 작품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관이 지곡池谷이고, 자를 가도可度, 득수得守라고 부른다. 호는 현동자玄洞子, 주경朱耕이라고 했다. 그는 산수화, 초상肖像, 화훼花卉, 기러기와 갈대, 누각과 말, 의장儀仗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그렸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현실과 이상의 경계

안견은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도화서의 선화善畵라는 종6품의 벼슬자리에서 정4품의 호군護軍이라는 높은 벼슬에 특진 되었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안견에 대해 “안견은 성격이 총민하고 정박精博하며, 옛 그림들을 많이 보아 그 요체를 모두 얻었고, 여러 대가들의 좋은 점을 모아 종합하고 절충했다. 무엇이든 잘 그렸지만 특히 산수는 그가 잘 그렸던 분야다. 옛날에도 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신숙주申叔舟,『보한재집保閑齋集』「화기畵記」”고 했다. 또 김안로(金安老, 1481-1537)는 안견에 대해 “안견은 옛 그림을 많이 보고, 그 그림의 심오한 묘리를 알았다. 곽희郭熙를 모방하면 곽희처럼 되고, 이필李弼을 모방하면 이필처럼 되었다. 유융劉融이든 마원馬遠이든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산수를 가장 잘했다(金安老,『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고 했다.

안견은 이성과 곽희의 이곽파, 마원과 하규의 마하파馬夏派 등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여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었다고 밝히고 있다. 안견의 화풍은 조선시대 화풍에 영향을 주고 있다. 안견의 대표작은 <몽유도원도>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현실과 이상의 경계

이상향(Utopia)이란 좋은 곳, 이 세상에 없는 곳, 실현될 수 없다 하더라도 꿈꿀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이상 세계에 대한 동경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를 떠나기는 쉽지 않다. 현실(Reality)이란 일상의 생활공간을 말한다. 지금 땅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바로 이곳이 현실 세계다.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치열한 경쟁에 내몰려 있으며 현장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 현실을 던져 버리고 어디론가 홀연히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으로 어디에서 지혜를 찾아야 할지 막연하다. 예부터 현실 속에 있으면서 이상향을 찾았던 무릉도원은 존재 여부를 떠나 동아시아인들의 사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무릉도원의 의미는 첫째, 학정에 지친 민초民草들의 도피 공간. 둘째, 불노장생을 꿈꾸는 선계 공간. 셋째, 시인 묵객들이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예술 공간으로 그려졌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3일 만에 그린 그림이다. <몽유도원도>에 내재된 현실과 이상 세계는 안평대군(1418-1453)의 꿈이 안견에 의해 은유의 기법으로 표현된 것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현실에서 겪어야만 했던 고민이 꿈을 통해 드러나게 되고, 그 꿈을 간직하기 위해 안견에 의해 그림으로 그려지게 된 것이다.

안견, <몽유도원도〉, 1447, 비단에 수묵담채, 38.7×106.5㎝, 일본 덴리[天理]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은 이상적인 정치는 군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사회이다. 이런 정치가 행해지는 사회의 백성은 해 뜨면 경작하고 해지면 쉬며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 그곳에는 집단에 대한 구조적 억압과 구속은 필요하지 않다. 도연명이 58세에 쓴 「도화원기桃花源記」는 노자의 소국과민에서 나온 것으로 그가 꿈꾸는 이상향理想鄕을 담아낸 작품이다.
안평대군의「몽유도원기夢遊桃源記」에 의하면, 세종 29년 1447년 4월 20일의 도원몽 후 3일 만에 화원 화가인 안견에 의해 <몽유도원도>가 완성되었다. 안평대군은 그림을 인수하고 즉시 「몽유도원기」를 지었으며, <몽유도원도>의 제찬題讚은 박팽년(朴彭年)의 몽도원서夢桃源序를 시작으로 하여 모아졌다. 안평대군의 글을 비롯해 당대 20여명의 고사(高士)들이 쓴 20여 편의 문장이 들어 있다.

안평대군은“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은자들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을시고, 천년을 이대로 전하여 보고 싶다. 삼년 뒤 정월 초하룻날 밤, 치지정致知亭에서 다시 이를 펼쳐 보고서 짓노라, 청지(안평대군의 자)(世間何處夢桃源 野服山冠尙宛然 著畫看來定好事 自多千載擬相傳 後三年正月一夜 在致知亭因披閱有作 淸之)”라고 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구도는 그림의 줄거리가 두루마리 그림의 통례와는 달리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전개되고 있다. 왼편의 현실 세계, 중간 부분의 현실과 이상의 경계, 오른편의 도원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몇 개의 경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왼편의 현실 세계는 정면에서 보고 그렸으나, 오른편의 도원 세계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그려내는 부감법俯瞰法을 구사했다. <몽유도원도>는 곽희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말한 고원高遠, 평원平遠, 심원深遠이 한 화면에 펼쳐져 있다.

조선 초기 회화 양식의 전형을 이룩한 안견의 화풍은 당시 화원들에게는 물론이고, 사대부 계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파됐다. 특히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의 무로마치(室町, 1336~1573)시대 수묵 화단에도 영향을 줬다. 이는 15세기 일본 수묵화의 거장 덴쇼슈분(天章周文, ?-?)이 1423-1424년에 조선에 다녀갔었다는 기록에 미루어 이른 시기에 조선화도 습득했을 것이다. 조선에 사절단으로 와 그림을 배워 간 영향으로 인해 무로마치시대 수묵화에서도 안견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성균관대학교 철학박사(동양미학전공)
경희대교육대학원 서예문인화과정 주임교수

<참고하면 좋을 자료>
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 돌베개, 2007
안휘준, 『한국회화의 전통』, 문예출판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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