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주의(象徵主義 Symbolism), 내면의 상상력과 감각의 세계로

인간은 사물과 형태에 의미를 부여하여 상징을 만들어 왔다. 이렇듯 상징은 고대에서부터 일상체계에 형태의 언어로 드러나고 있다. 상징주의(象徵主義, symbolisme)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사실주의적 예술운동이다. 상징(symbol)은 증표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symbolon’에서 나왔다. 기호 자체가 주체화하여 다양한 의미를 촉발하는 것, 즉 창조적 기호를 상징이라고 한다(사사키 겡이치, 『미학사전』, 민음사, 2002).

상징주의 미술은 전통적 규범을 중시하는 아카데미즘, 인상주의, 사실주의, 산업문명을 비판하면서 출발한다. 상징주의 미술의 특징은 상징과 우의(寓意)에 있다. 첫째, 인간 내면의 세계와 상상력과 감각에 주목한다. 둘째, 신화와 전설, 불안과 공포, 죽음과 성(性) 등 꿈과 무의식과 같은 비사실적인 주제를 택한다. 셋째, 일상적 이미지를 압축하여 감정이나 생각을 상징화 한다.

모로, <환영, 살로메의 춤>,
캔버스에 유채, 103×142㎝, 1875

상징주의 미술은 자연의 모방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내면세계로 시선을 돌리고 있으며, 1848년 영국에서 시작한 라파엘 전파(Pre-Raphaelitism)와 미술공예운동(Art and Craft movement), 독일의 유겐트 양식(Jugendstil)의 영향을 받았다. 독일어 유겐트(Jugend)는 ‘젊다’라는 말로 유겐트 양식은 아르누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새로운 미술’을 뜻하는 아르누보(Are nouveau)는 1760년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이후 기술발전, 예술품의 대량 생산 가능으로 인해 예술품이 파괴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 예술가들이 수공예와 중세 장인 세계를 동경하며 19세기~20세기 초에 일어난 미술과 공예 운동을 말한다. 아르누보는 꽃이나 식물 덩굴에서 따온 장식적인 곡선을 특징으로 한다.

모로는 자신의 감정을 면밀한 구성과 세밀한 묘사와 색채로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역할과 20세기 새로운 회화의 길을 열었고, 클림트는 아르누보, 자포니즘의 영향을 받아 감각적인 색채로 탐미주의(耽美主義)적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대표작가로는 구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과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등이 있다.

클림트, 황금빛 에로티시즘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상징주의 화가이다. 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에서 태어난다. 부친은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로 훗날 그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다. 1876년 동생 에른스트와 함께 빈 공예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 장식 교육을 받았다. 1883년까지 이곳에서 모자이크 기법이나 금속을 작품에 이용하는 방법, 그리스 도자기미술, 이집트 벽화와 바빌론의 부조, 슬라브 민속학 등 수 세기동안의 미술과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다양한 장식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졸업 후 동생 에른스트,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벽화 그리는 일을 시작한다.

1880년대 말 빈에 새로 들어선 국립극장과 미술사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려 건축 장식미술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1892년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가 뇌졸증으로 사망하자 자신도 그같이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1897년 클림트는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접근하고자 하는 빈 분리파를 결성하여 초대회장으로 추대된다. 그들은 과거의 관습에서 떨어져 나온 예술을 추구하며 스스로 분리파(Secession)라 불렀다.

<유디트1>(1901년)는‘황금 스타일’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1903년 베네치아, 라벤나, 피렌체 방문하면서 클림트의 본격적인‘황금시대’가 열린다.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의 황금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하는 독창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1904년 브뤼셀의 스토클레 저택 모자이크 벽화를 디자인하고 스케치한다. 1905년 클림트는 빈 분리파를 탈퇴한다.

클림트, <키스>, 캔버스에 유채, 180×180cm, 1907~8

1907년 젊은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와 만난다. 1911년 <죽음과 삶>으로 로마 만국박람회에서 일등상 수상하고, 1912년 <죽음과 삶> 배경을 푸른색으로 변경한다. 1915년 모친의 사망으로 그림의 색채는 점차 어두워졌고, 풍경화 역시 단색조로 변한다. 1916년 에곤 실레 등과 함께 베를린 분리파의 ‘오스트리아 예술가 동맹전’에 참가한다.

클림트는 1918년 1월 11일 갑작스러운 뇌출혈이 있은 후, 같은 해 2월 6일 합병증으로 56세에 생을 마감한다. 클림트는 평생 수많은 여성과의 염문에도 불구하고 독신으로 살았다. 그의 임종을 지켜 본 사람은 육체적 사랑을 뛰어 넘어 정신적 사랑의 동반자로 함께 했던 동생 에른스트 아내의 여동생인 에밀리 플로게와 클림트의 임종모습을 스케치한 에곤 실레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는 화가로 꼽히는 클림트의 대표작으로는 <부르크 극장 장식화>(1888), <유디트1>(1901), <희망1>(1903), <키스(The Kiss)>(1907~8),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1907), <생명의 나무>(1905~9), <죽음과 삶>(1911)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아델레의 초상, 화려한 장식성

<아델레 블로흐-바우어1, Frau Adele Bloch Bauer1>(1907)에 나오는 모델 이름은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이다. 클림트가 아델레를 처음 만난 건 1901년이다. 그 후 12년간 클림트와 연인으로 지냈다고 한다. 남편인 블로흐-바우어는 1903년 당시 26살이던 아내의 초상화를 클림트에게 부탁한다. 이 그림은 1907년 완성되었다. 보통의 초상화는 인물이 중심이지만 클림트의 초상화는 배경과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클림트의 벽화그리기 방식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식적이고 공간미가 있다.

클림트,〈아델레 블로흐-바우어I〉,
캔버스에 유채, 금은, 138×138cm, 1907

작품의 주인공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오스트리아 모나리자>, <우먼인 골드>로 불렀다. 이 작품은 남편인 블로흐 바우어의 소유인데, 1938년 나치에 의해 약탈당했다가 바우어의 손녀가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7년간의 소송 끝에 승소해 되찾았으며 현재는 미국에 소장되어 있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1>의 작품은 섬세한 문양의 표현과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인다. 이 작품의 상징들은 고대 도상[icon]에 가깝다. 금은 비잔틴 모자이크화를 연상시키고, 의상에 표현된 눈의 형상은 이집트 양식으로 그려져 있고, 일본[자포니즘]의 특징이 나타난다. 여기에 등장한 초상화의 인물은 장식적인 패턴과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

클림트는 원시주의, 이국적인 미술, 민속미술, 일본미술의 요소를 절충하여 화려한 장식성을 보여주고 있다. 클림트의 개성적인 색채와 공간 구성은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와 같은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성균관대학교 철학박사(동양미학전공)
경희대교육대학원 서예문인화과정
주임교수

<참고하면 좋을자료>

사사키 겡이치, 『미학사전』, 민음사, 2002
에바디스테파노, 김현주 역, 『구스타프 클림트』, 예담, 2006
프랭크 휘트포드, 김숙 역, 『클림트』, 시공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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