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호 작가의 다섯 번째 개인전이 오는 7월 25일(수) - 31일(화)까지 경인미술관 제6전시실에서 ‘꿈, 뿌리를 찾기위한 여정’의 주제로 열린다.

꿈, 뿌리를 찾기 위한 여정

문자(文字)는 문화의 정수(精髓)이다. 왜냐하면 문자는 그 시대의 삶을 압축시켜 문화의 특수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문자를 이용하여 문장을 조탁(彫琢)하면 문학작품이 되고, 또 그것을 쓰면 서예작품이 된다. 시인은 문자를 이용하여 삶의 흔적을 노래하고, 서예가는 문(文)과 자(字)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조형화시켜 삶의 흔적을 노래한다.

얼마 전 셍택쥐베리의 『어린왕자』를 읽었다. 고전은 씹을수록 달다. 라는 의미를 느끼게 하는 책이다.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말했다.

김찬호, <가족1>, 65x53cm, 2018

“비밀을 알려줄게 아주 간단해. …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정확히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거든.” 어린왕자는 말한다. “내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53분이 있다면 신선한 샘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갈 텐데.”,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앞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주어져 있는지 모른다. 세상을 보는 안목(眼目)을 어린왕자를 통해 배운다.

나에게 샘은 고향이다. 샘은 생명의 원천이고, 삶의 원천은 바로 고향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외딴집 작은 방에서 친구에게 서예를 하고 싶다는 꿈을 말했고, 그 꿈이 현실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번 다섯 번째 전시‘꿈, 삶의 뿌리를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고향은 그리워하면서 정다운 곳이자 삶의 뿌리다. 누구나 고향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각인(刻印)되어 있는 장면이 떠올려진다. 그 고향의 추억이 이번 전시의 주제다.

어릴 적 고향에 대한 기억의 편린(片鱗)들을 더듬어 본다. 산, 바람, 누에, 보리, 외딴집, 새, 짝사랑, 아버지의 눈물, 꿈, 친구, 황토길 등이다. 아버지의 시작노트와 일기장을 몰래보고, 하이네, 유치환, 이상의 시집과 까뮈의 『페스트』 등의 문학작품을 읽었다.

김찬호, <꿈1>, 52x67cm, 2018

알수 없는 말과, 내용 속에서 무서움에 떨었던 유년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추억이 감성과 삶의 울림으로 작동되고 있다. 어릴 적 꿈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 낸다.

고향향(鄕)은 잔치할 향(饗)의 본자이다.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사람을 초대하다의 뜻을 담고 있다. 자형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고 그 중간에 그릇이 있는 모습이다. 꿈[夢]의 자형은 한 사람이 침상위에 누워 꿈을 꾸고 있는 모습이다. 바람[風]은 갑골문과 금문의 자형에는 봉황의 모 습으로 꼬리부분의 깃털을 강조하고 있다. 풍(風)으로 가차되어 사용한다. 모을 집(集)의 자형은 새가 나무위에 둥지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후에 의미가 확장되어 모으다, 모이다의 뜻을 갖게 되었다. 밭의 보리[齊]는 일반적으로 가지런하게 자란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세 개의 보리이삭으로 ‘가지런하다’의 뜻을 표시했다. 밤늦도록 탈곡기에서 나오는 보리낱알의 작은 가시가 옷 속으로 파고들어 아프게 했던 기억이 있다.

외딴집 방풍을 위한 편백나무가 둘러져 있고 그 곳에 새들이 살고 있다. 집을 짓고 알을 부화하여 새끼를 낳는다. 두 번이나 새집을 내려놓아 새끼들을 부모와 이별시켰다. 직접 키우겠다고 가져온 욕심이 화를 낳게 된 것이다. 어미새와 새끼새에 대한 애틋함을 담고 있다. 이렇듯 문자는 시대를 달리하면서 형태와 의미가 변형되어 사용된다. 문자의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삶을 말하는 새로운 조형언어로 만들어내고 싶다.

우뚝 솟은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산, 남녘 황토길 지나 넓은 들판 사이로 큰 산이 있다. 거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어떨 때는 한 발짝 앞을 내딛을 수 없게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여름 날 맑은 대낮에 소나기가 지나고 흙냄새와 함께 코끝을 상쾌하게 찌르기도 하고[瀟灑], 이 잡아 주던 엄마의 손길과 같은 따뜻한 바람도 있다.

얼마 전 아버지께 요즘 왜 시를 쓰지 않으세요? 라고 물었다.

김찬호, <고향1>, 70x55cm, 2018

아버지는 “시를 쓰면 몸이 아프다. 그래서 시를 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다. “아파서 시를 쓰지 않는다.”그 말 가슴에 시리다. 언어를 조탁(彫琢)하여 시 속에 생명을 불어넣듯이 문자를 조탁하여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고 싶다.

이번 전시는 삶의 원형으로서의 고향, 가족, 꿈, 친구를 노래한다.

마음의 고향은 삶의 원형이고 또 부족함을 메워주는 샘과 같다. 어떤 면에서 작품은 삶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나쁜 것을 물리치는 그래서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할 부적과 같은 것이다. 삶을 치유하고 변화하면서도 단단해지는 작품세계를 가져가고 싶다. 1992년 12월 10일에 쓴 김정식(金正植, 1937~)님의 시, <109> 마지막 시구이다. “풀꽃에 이는 바람을 껴-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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