Ⅸ. 백담사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호(號)는 일해(日海)이다. ‘해 뜨는 바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호를 알고는 있으나, 설마 이 호를 탄허스님이 지어준지는 모른다. 잘 알려진 바대로 탄허스님은 민족의 영광을 예언한 우리 시대의 큰스님이셨다. 아마 불자(佛者)치고 탄허스님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법정스님도 백담사에 있는 전두환 대통령을 자주 찾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많은 스님들이 전두환 대통령의 백담사행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큰스님들치고 전두환을 찾지 않은 스님은 드물었다고 본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하여 군에 남아 있고자 하였던 노태우를 예편시켜 정무장관을 시킨 것부터 88서울올림픽, 86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 민정당 총재까지 후계자로서의 모든 수업을 마치게 하였다. 그리고 대통령 당선 후에는 통치자금까지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노태우는 전두환을 배신한다. 당시 전두환을 제외한 많은 언론인들과 측근들은 노태우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김정렬은 전두환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노태우를 잘 아십니까?”

전두환은 ‘그렇다’고 하였다.

1년 후 88년 봄, 김정렬은 다시 묻는다.

“지금도 노태우를 믿슴니까?”

전두환은 같은 답변을 한다.

“잘 안다. 지금도 믿는다.”

전두환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전두환은 이 답변이 있은 후 약 6개월 후에 백담사로 유배를 떠난다. 1988년 3월 31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비리와 관련하여 친동생 전경환이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5공 비리가 터져 나오자, 노태우는 정국 안정을 위해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낸 것이다. 1988년 11월 23일의 일이었다.

전두환은 의리를 중시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번 믿은 사람을 두 번 다시 의심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향해 "나를 밟고 올라가라"는 발언으로 노태우를 적극 지지하고 후원한, 진정한 의미의 친구였다. 그러나 노태우는 짓밟는 정도를 넘어서서 전두환을 백담사로 귀양을 보냈던 것이다. 일종의 유배형, 전두환은 몇 개월만 지내면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1989년 12월 31일 국회에 출석해서 5.18 민주화운동 증언을 할 때까지, 전두환이 집으로 가기에는 2년 이상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당시 백담사로 떠나기 전, 전두환은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남긴다.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본인이 재임했던 기간에 있었던 모든 국정의 과오는 그것이 누구에 의해 착안되었고 또 어느 기관의 실무자가 시행한 것이건 간에 모두가 최종 결정권자이며 감독권자인 바로 이 사람에게 그 책임이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로 인해서 온 사회가 들끓고 있는 큰 물의가 빚어지고 있는데 대해 한량없이 죄송스럽다. .

(광주문제에 대해) 그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 대통령이 된 뒤에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는 점을 깊이 후회하면서 피해자와 유가족의 아픔과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지 않겠다. 당시의 국가적 비상시국하에서 아무런 준비와 경험도 없이 국정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또한 오랜 병폐를 하루 빨리 뿌리뽑고 기강을 바로잡아 사회의 안정과 국가발전을 도모해야한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시행착오를 가져오게 된 것이라고 솔직히 인정한다.

국민의 기본적인 권익을 침해한 이러한 사례들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이 기회를 빌어 피해당사자 한분 한분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며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친인척비리와 관련) 재임중 처리하지 못한 채 대통령직을 물러난 지금 많은 집안사람들이 형사소추를 받을 정도로 비리를 저질러서 국민 여러분의 분노를 사게 된 것은 참으로 면목이 없다. 진심으로 사죄하며 머리 숙여 용서를 빈다.

연희동집 안채 (대지 3백85평 건평 1백16.9평) 와 두 아들이 결혼해서 살고있는 바깥채 (대지 94평 건평 78평) 서초동 땅 2백평 용평의 콘도(34평) 하나와 골프회원권 2건등 부동산과 83년 총무처에 등록한 19억여원과 그 증식이자를 포함한 23억여원의 금융자산을 갖고 있으니 이 재산은 정부가 국민의 뜻에 따라 처리해주기 바란다.

퇴임후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됨에 따라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나름대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사용할 요량으로 여당총재로서 사용하다가 남은 1백39억원을 관리해왔으나 지난 4월 자문회의 의장직을 사임한 만큼 이제 이 돈은 우리나라 정치발전을 위해 국가가 관리해 주기 바란다.

여러분의 마음을 후련하게 풀어드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모처럼 시작된 민주화를 통해 국민의 화합을 이룩할 수 있다면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치면서 국민 여러분의 심판을 기다리겠다.

국민 여러분이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국민 여러분이 가라고 하는 곳이면 조국을 떠나는 것이 아닌 한 속죄하는 마음으로 어느 곳이라도 가겠다.

전두환은 외국으로의 망명과 고향으로의 낙향 대신, 추운 절을 유폐장소로 택했다. 백담사는 손삼수 비서관이 조계종 당시 서의현 총무원장에게 추천 받은 곳이었다.

전두환은 그 때까지 백담사라는 절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었다. 그러나 불자(佛者)였던 형수를 통해 백담사 대웅전 불사 때 보시를 했던 적이 있었다. 대웅전 어느 기둥 주춧돌 밑에는 전두환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고 한다.

전두환은 백담사에서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묵었다. 이 방은 두 사람이 눕고 나면 윗목에 책상 하나를 겨우 놓을 수 있었다. 방을 덥히려 아궁이에 군불을 때면 매운 연기가 방을 채웠다. 수도도 전기도 없었다.

백담사에서 전두환은 노태우의 배신에 대한 분노로 밤을 새운다. 의리를 중시하고, 사내다움을 철칙으로 여겼던 전두환이었기에 분노는 그만큼 컸다.

그 무렵 법정 스님, 지학순 주교, 김장환 목사 등이 다녀갔다. 전두환은 예불로 마음을 달래보려 했다. 전두환은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일해'라는 아호를 준 탄허 스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국태민안과 영가천도'를 위한 기도를 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 영령들과 , 일본에 의해 희생된 한민족 영령, 6.25전쟁 희생 영령,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 영령, 삼청 교육 희생 영령 등의 천도를 빌었다. 기도는 매일 새벽 4시, 오전 10시, 오후 2시, 오후 6시 네 차례씩 했다. 이 가운데 오후 2시 기도는 불교 교리 공부나 경전을 읽는 것으로 대신했다.

전두환은 경전 공부를 한 오후 2시 기도 외에 하루 세 번 기도 때마다 108배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20일째 첫 번째 장애가 왔다. 지독한 몸살이었다. 50일이 지나자 육식을 금해서 생긴 메스꺼움과 구토 빈혈을 동반한 입덧 증세가 나타났다. 전두환은 죽을 각오로 버텼다. 그리고 가피(加被)를 얻은 것이다.

가피(加被)란, 일체중생이 부처의 은혜 속에서 생명을 유지 보존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은 사은의 가호하심과 가피를 입고 살아가며, 중생은 그 은혜를 알고 보은행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전두환의 가피(加被), 그것은 부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에 열중한 결과였다.

당시를 전두환은 이렇게 기억한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기도 70일 가량 지나자 우리 내외를 괴롭히던 증세가 말끔히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해졌다. 오랜 만에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내 얼굴이 맑아지고 빛이 난다고 했다."

이때 비로소 전두환은 분노와 번민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과연 우리 같은 범인(凡人)의 그릇은 아니었다. 우리 같으면 평생 기도를 해도 얻기 힘든 가피를, 기도 70일 끝에 얻는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불법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태우에게 업보(業報)가 찾아든다. 5년 후, 노태우는 차기 대통령감으로 김영삼을 후계자로 낙점한다. 5공청산을 부르짖는 민주화세력들로부터. 김영삼의 보호를 받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군사정권으로 매도하며, 5.18특별법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학살자로 만들어 법정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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