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진실의 다면(多面)을 위하여

1980년대 우리는 전두환 전(前) 대통령을 ‘돌’이라 불렀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지적인 풍모가 없는 담담하게 생긴 그의 외모와 벗겨진 머리, 그리고 이름 두환에서 ‘두’를 연결시켜 ‘돌’이라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그의 이미지는 정말로 ‘돌’이었던 것 같다. 돌처럼 강하고 돌처럼 우직하고 돌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 전두환은 처음과 끝이 변함없이 한결같은 성격의 위인(偉人)이었다.

그처럼 전두환은 솔직담백한 성격을 지닌 무인(武人) 기질의 대통령이었다. 만약 모든 것을 제쳐두고 성격만으로 역대 대통령을 평가하라면, 전두한은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백담사로 보낸 노태우의 병문안을 간 사람이었고, 사형선고를 내린 김영삼의 장례식에 찾아갔을 뿐만 아니라, 김대중의 장례식 때도 변함없이 예의를 갖춘 인물이었다. 사내대장부답게 털건 털고 가는 그는 의리 또한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런 그가 ‘살인마’라는 잔인하고 야비한 인간으로만 비춰진다는 것은 좌파의 소설적 각색이 동원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 그가 정말 잔인하고 야비한 인간이라면 아웅산 테러를 당하고난 후, 북을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정적(政敵) 김영삼과 김대중을 어떤 식으로든 처치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일반의 정치인들처럼 거짓말로 남을 현혹시키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는 사내대장부였고, 세상을 솔직담백한 시각으로 보는 남자였다. 세월호 유병언이를 위험하게 보고 거부한 사람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이러한 성격의 전두환은 우리 현대사에서 인상 깊은 두 가지 위대한 업적을 쌓아놓은 대통령이었다. 그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작한 ‘한강의 기적’을 이어받아 경제를 완성한 일이고, 또 하나는 대통령으로서 7년 단임 약속을 실천하여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낸 일이다. 이 평화적 정권 교체가 바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영국과 서독의 정치인들은, 재임기간 중 안정보장상의 중대한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 한 점과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하고 대통령직을 떠난 점을 들어, 전두환을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노벨위원회에 추천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여느 독재자처럼 일신(一身)의 영화와 안녕만을 바란 사람이었다면, 이 두 가지는 실현될 수 없는 주제였을 것이다. 어느 독재자가 나라와 민족의 풍요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경제에 집중했을 것인가. 그는 스스로를 무식한 자라 인정했다. 그리고 경제전문가에게 이 모든 일을 맡겼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나도 배우겠다. 당신들은 마음 놓고 경제를 완성시켜라.”

참으로 전두환다운 단순솔직한 리더쉽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두환은 임기 중 우리나라 경제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지금도 경제학자들은 전두환 시대를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였다’는 평가를 한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전두환은 단임 약속을 지켰고 그리고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으며,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현재 문재인까지 무려 6대에 이르는 6공화국의 기초를 닦았다.

만약 전두환이 권력에 취하여 정권 연장을 꾀했다면, 막을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역사가의 판단이다. 그만큼 그는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하고 있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집회에 철퇴를 내렸을 수도 있을 만큼 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6.29 선언 당시 측근들은 계엄령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전두환은 계엄령을 내리지 않았다. 취임 초 ‘두 번 다시 군을 동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선호하던 내각책임제에서 직선제로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헌법을 개정하였다.

그리하여 전두환이 만든 헌법으로,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까지 6명의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제6공화국 6기임을 명심해야 한다.

필자(筆者)는 이 두 가지 면에 초점을 맞추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바르게 잡고자 한다. 지금 쓰고 있는, 전두한에 대한 일반의 평가를 거부하는 나의 반론(反論)은 오로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전두환에 대한 이 두 개의 각각 다른 평가에 대한 문제를 풀지 않고는 대한민국은 과거의 족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미래 또한 장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단면(單面)만으로 존재하는 존재는 없다. 하나의 평면(平面)으로만 존재하는 존재는 절대 없다. 존재하는 사물의 절대성은 다면이다.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물과 인생, 그리고 추상적인 관념까지,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다면적이며 입체적이다. 앞과 뒤가 있으며 위와 아래가 있고 측면이 있다.

그리하여 그대가 그 무엇인가에 대한 정체를 정확히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한 면에서 생각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는 저 뒤편의 것까지 살펴볼 줄 알아야, 우리의 판단은 올바른 길을 가게 된다.

코끼리의 다리만 보고 기둥이라 주장하는 오류는 편견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편견은 분열과 오해와 악(惡)을 조장한다. 편견은 선입견을 발생시킨다. 자신의 시각과 판단을 버리고, 누군가의 판단에 좇아가는 것. 어떤 선입견에 의해 자신의 시각과 판단을 버리는 것도 악(惡)을 지원한다. 그러므로 편견과 선입견 모두 올바른 판단과 진실에 반(反)하는 악(惡)이다. 전두환을 바라보는 그대의 시각이 이렇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전두환 전(前) 대통령에 대한 일방적인 평가도 편견에서 출발한다. 5.18 당시 시민군을 향해 사격명령을 내린 자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하여 ‘살인마’라고 한다. 그러나 그 주장 역시 단면만을 바라본 편견이며 오류이다.

전두환, 그는 자존심 강한 무인(武人)이다. 그는 직선적이고 단순솔직한 사람이며, 의리를 철칙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이다. 끝까지 충성을 다한 장세동이란 인물에게서 보았듯이 그는 의리를 무엇보다도 중히 여겼다.

그러므로 그의 성격상 사격명령을 직접 내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사격명령은 당시 도청 앞에서 버스를 몰아 경찰관을 살상(殺傷)을 한 사건 이후 위협을 느낀 현장 지휘관들이 내린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대법원도 그렇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다만 총기가 탈취되고 시민군들이 무장을 한 이후, 교도소가 습격을 당하는 등 광주가 무정부사태에 빠졌을 때부터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수뇌부에서 진압을 위한 사격명령을 내렸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전두환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5.18이 아니라 다면(多面)에서 찾아야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그러므로 역사엔 편견이 없다. 역사 역시 인간처럼 입체적인 존재이며, 주관이 아니라 객관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다면의 평가를 통해 진실을 기록한다.

헤겔은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은 두 번 반복한다고 썼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반복한다고 하였다. 이제 전두환 전(前) 대통령도 비극에서 일어나 희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의라고 필자(筆者)는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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